우리역사

[스크랩] 환국(桓囯)이 아니고 환인(桓因)이다.

행복한 산비둘기 2017. 8. 7. 10:48

 

환국(桓囯)이 아니고 환인(桓因)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기(古記)를 인용하면서 고조선(왕검조선)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옛날에 환인[桓因, 제석(帝釋)을 말한다.]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 천하(天下)에 자주 뜻을 두어, 인간세상(人世)을 구하고자 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니 인간(人間)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주며 가서 다스리게 하였다.

()이 무리 삼천을 거느리고 태백산(太伯山) 정상[, 태백(太伯)은 지금의 묘향산(妙香山)이다.]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와 신시(神市)라 하고, 이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 하였다.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를 거느리고 곡((((선악(善惡) 등 무릇 인간의 삼백 육십여 가지의 일을 주관하며 세상을 다스리고 교화하였다.”

 

윗글은 단군이 최초로 나라(조선)를 세웠다는 건국이야기 앞부분이다.

그런데 건국이야기가 역사적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함축적이거나 상징적인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어서 건국이야기의 의미에 대하여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 왔다.

우선 윗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옛날에 환인이 있었다[昔有桓因(謂帝釋也)],’는 구절에서 환국(桓因)’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많은 논란이 있었다.

특히 석유환인(昔由桓因)에서 환인(桓因)’이 본래 환국(桓國)’이었는데, ‘환인(桓因)’으로 변조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환인(桓因)’이 올바른 것인지, 아니면 환국(桓國)이 올바른 것인지에 관하여 오랫동안 첨예하게 주장이 대립되어 있었으며, 아직도 논란이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수록되어 있는 많은 글들이 상기한 단군의 건국이야기 못지않게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내용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환인(桓因)’인지, ‘환국(桓國)’인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함축적이고 상징적인 내용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바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삼국유사원본은 아래와 같이 임신본과 고판본 등이 국보 또는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개인(미공개) 소장 고판본(3~5): 국보 제306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임신본(1~5): 국보 306-2

곽영대(郭永大) 소장 송은본(松隱本, 3~5): 보물 제419

송석하(宋錫夏) 소장(현재 소재불명) 석남본(石南本, 1)

성암고서박물관(조병순) 소장 고판본(2): 보물 제419-2

부산 범어사 소장 고판본(4~5): 보물 제419-3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임신본(3~5): 보물 419-4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 (석남본 및 송은본의 필사본)

 

삼국유사임신본(壬申本)은 조선 중종 7(1512)에 새로 간행된 목판본이다. 또 임신본보다 앞선 시기에 편찬된 것들을 고판본(古版本)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상기한 국보와 보물 중에 고조선(왕검조선)이 실려있는 제1권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임신본(1~5)송석하(宋錫夏)가 소장했던 석남본(石南本, 1)에만 남아있다.

현재 석남본(石南本)은 소재불명이라고 한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는 임신본(목판본)에는 석유환국(昔由桓囯)’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석남본(목판본)에는 석유환인(昔由桓)’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림 1] 서울대학교 소장 임신본 석유환국(昔由桓囯)

 

 

 

또 일제 도쿄제국대학에서 1902년에 발간한 교정삼국유사(활자본)1904년에 발행한 삼국유사(활자본)에는 모두 석유환국(昔由桓國)’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일제 도교제국대학이 발행한 교정삼국유사삼국유사는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기 전에 발행되었는데, 일본인 쓰보이 구메조(坪井九馬三)과 구사카 히로시(日下寬)이 교정을 봤으며, 두 책의 출판연도만 다를 뿐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임신본(壬申本)과 도쿄제국대학이 발행한 삼국유사를 서로 비교해 보면, 곳곳에 서로 다른 주석(註釋)이 붙어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했는데, 아사달의 위치에 관하여 임신본(壬申本)에는 개성(開城)의 동쪽에 있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고, 도쿄제국대학이 발행한 삼국유사에는 관성(關城)의 동쪽에 있다.’고 주석이 붙어 있다.

따라서 도쿄제국대학이 발행한 삼국유사임신본(壬申本)이 아니라 다른 판본을 활용하여 활자본으로 발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삼국유사임신본(壬申本, 1512, 목판본)()()의 속자(俗字)이므로 같은 글자이지만, ‘()’()’자는 완전히 서로 다른 글자이기 때문이다.

또 일제 도교제국대학이 1902년에 교정삼국유사(활자본)를 발행하면서 일본인 전문가 두 명이 교정을 보았으며, 1904년에 삼국유사(활자본)을 발간하면서 수정하지 않았으므로 교정상의 오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런데 일제 교토대학이 1921년에 발행한 삼국유사영인본은 환국(桓囯)의 국()자 위에 덧붙여 써서 인()자로 만들어 놓은 것을 영인한 것이다.

, 일본인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소장하고 있던 임신본(壬申本)을 영인한 것으로서 금서본(今西本)’ 또는 임신가필본(壬申加筆本)’이라고 부르는데, 본래 순암(順庵)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소장하고 있었던 것으로서 현재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 도서관에 귀중본으로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 덴리대학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임신가필본(壬申加筆本)’을 확인한 결과, ‘()를 펜으로 긋고 외곽 공간으로 선을 그은 후 외곽 공간에 ()를 써놓았다.

()’자를 펜으로 긋고 외곽 공간으로 선을 그은 후 외곽 공간에 ()’자를 써놓았다.

결국 그간 우리나라에 임신가필본(壬申加筆本)’이 널리 유포되고 번역됨으로써 석유환국(昔由桓囯)’대신에 석유환인(昔由桓因)’이 보다 많이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상기한 삼국유사중에서 송석하(宋錫夏)가 소장했었던 석남본(石南本, 1, 현재 소재불명)에는 석유환인(昔由桓)’으로 기록되어 있다.

, 석남본(石南本)은 임신본(壬申本, 1512, 목판본)보다 이른 시기에 간행된 고판본인데, 2000년에 중화민국교육부에서 발행한 이체자자전(異體字字典에 따르면, ()자와 인()는 모두 인()자의 이체자라고 한다.

한편, 삼국유사 임신본(壬申本)이 판각(1512)되기 이전에 편찬된 단종실록(노산군일기)즉위년(1452) 628일 기록에 따르면, ‘三國遺史, 有曰 古記云 昔有桓因庶子桓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임신본(壬申本) 이전의 삼국유사환인(桓因)’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최남선(1890~1957)은 임신본보다 고본(古本)인 석남본(石南本)을 비롯하여 광문회본(光文會本), 순암수택본(順庵手澤本, 임신가필본) 등을 교감하여 임신본(壬申本)()’자가 본래 ()’자의 이체자(異體字)(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자로 새겨야 하는 것을 실수하여 ()’로 잘못 새긴 오자(誤字)라고 고증하였다고 한다.

, 최남선이 번역한 삼국유사(서문 문화사)에는 석남본(石南本)과 같이 석유환인(昔由桓 )’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조경철은 단군신화의 환인환국 논쟁에 대한 판본 검토(한국고대사탐구, 2016)에서 조선 초기 삼국유사桓𡆮으로 표기된 것을 조선 중기 임신본에서 𡆮자가 자인지 모르고 에 획을 하나 더 그어 으로 만들어 桓囯이 되어버린 것이다. 桓囯桓國이 되어 재야에서 고조선보다 몇 천 년 전에 세워졌다는 환국의 허상이 생겨나게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 환국(桓囯)'이라고 하여도 의미상으로 큰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때의 국( )자는 통치체제로서의 나라라고 하기 보다는 사유세계(思惟世界)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 환국(桓囯)'이 아니라  환인(桓因)’임을 알게 되었다.   

 

출처 : 동북아역사연구소
글쓴이 : 광화세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