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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8.『사기』 흉노열전은 부여사(夫餘史)

행복한 산비둘기 2017. 10. 23. 13:42






동방(東方)의 비밀(I)

조선천축

(朝鮮天竺)





18.『사기』 흉노열전은 부여사(夫餘史)



『후한서』 열전 중에 권 제89는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이다. 남흉노열전이 있으니 북흉노열전도 있을법한데, 북흉노열전은 별도로 없다. 즉, 권 제87은 서강전(西羌傳)이며, 권 제88은 서역전(西域傳)이고, 권 제90은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으로 편집되어 있는데,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런데 동이열전(東夷列傳)처럼 각 국(지역)의 열전이 ‘열전(列傳)’이라고 명칭이 붙어 있는데, 서강전(西羌傳)과 서역전(西域傳)은 그냥 ‘전(傳)’이라고 명칭이 붙어 있다.
그러니 서강전(西羌傳)과 서역전(西域傳)은 통째로 갈아 꼽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즉, 우리나라 고대 역사를 왜곡시킨 것처럼 서강(西羌, 티벳 지역)과 서역(西域, 신장위구르 지역)도 뜯어고쳐 지명 변이(變移)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표 1> 각 사서별 외국 열전의 권별 분류내용


사 기

한 서

후한서

삼국지

진 서

흉노

흉노

동이

오환선비동이

동이

남월

서남이양월조선

남만서남이


토욕혼

동월


서강


흉노

조선


서역





남흉노





오환선비






또 『사기』 열전 중에는 조선열전이 있으며, 『한서』 열전 중에는 서남이양월조선전이 있다. 즉, 『사기』와 『한서』에는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열전이 있으나,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는 조선열전은 없어지고 동이열전으로 편집되어 있다.
즉, 『사기』, 『한서』,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위만조선이 한(漢) 무제(武帝) 유철의 공격을 받아 마치 서기전 108년에 멸망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朝鮮, 위만조선)과 한(漢) 무제(武帝) 유철이 서기전 109~108년 기간에 전쟁을 했다는 기록만 뎅그러니 남아있다.
이어서 『후한서』 이후에 조선(朝鮮,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은 사라지고 동이전에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韓) 등에 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데,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즉,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韓) 등의 많은 나라들이 마치 조선(朝鮮)이 망한 후에 비로소 새로 생긴 나라들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표 2> 각 사서별 조선열전(또는 동이열전)의 내용


사 기

한 서

후한서

삼국지

진 서

위 서

북 사

조 선

조 선

부 여

부 여

부 여





읍 루

읍 루

숙 신


물길(읍루)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고구려



동옥저

동옥저











마 한

변 한

백 제

신 라

백 제

신 라




다시 말해서 부여에 관한 기록이 『사기』와 『한서』에는 아예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따르면, 『후한서』를 인용하면서 해모수(解慕漱)가 마치 서기전 59년에 북부여를 흘승골성에서 건국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명(明) 초에 명(明) 대의 사관(史官)들이 부여에 관한 기록을 『사기』와 『한서』에 남기지 않았으니, 조선의 사관(史官)들은 『삼국유사』에 부여에 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16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기』 화식(貨殖)열전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燕)의 주위에 제(濟), 조(趙), 부여, 조선 등이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趙)는 서기전 403년에 생겨서 서기전 228년에 망했으며, 연(燕)은 서기전 222년에, 제(濟)는 서기전 221년에 각각 망했으므로 [그림 1]의 상황은 서기전 403~228년 기간 중임을 알 수 있다.


[그림 1] 『사기』 화식(貨殖)열전



여기서 부여와 조선은 최소한 서기전 228년 이전에 이미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또 앞서 9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周, 서기전 1046~256년)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다면, 조선은 이미 서기전 1122년, 1062년, 또는 1002년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는 주(周)의 호왕(虎王, 武王)이 상을 멸망시킨 해가 서기전 1046년이라면, 조선은 이미 서기전 1042년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또 앞서 14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한 북부여는 서기전 714년, 654년, 또는 594년 중에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물론 해모수(解慕漱)의 건국연도가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삼국유사』에 근거하여 소위 북부여가 춘추시대에 건국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으며, 해모수(解慕漱)의 아들 해부루가 건국한 동부여는 북부여가 건국된 이후에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해모수(解慕漱), 해부루(解夫婁), 북부여, 동부여 등은 현재의 중화인민국 25사(史)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다. 즉, 중화인민국 25사(史)에는 부여(夫餘)란 국호로 기록되어 있으나,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夫餘)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해부루(解夫婁)의 동부여와 내용이 거의 같다.
아무튼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당요(唐堯, 요임금)와 우순(虞舜, 순임금) 이전 시기에 산융(山戎), 험윤(獫狁), 훈죽(葷粥) 등 여러 종족이 북방의 만지(蠻地)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1,300년대 후반 은(殷) 무정(武丁) 시대 갑골문에 토방(土方)이라 불리던 이민족이 변경을 침략하여 주민과 가축을 약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周, 서기전 1046~256년) 대 『주례(周禮)』와 『역경(易經)』에 토방(土方), 귀방(鬼方), 마방(馬方)이라고 불리던 종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서주(西周, 서기전 770~256년) 말 청동기 명문에 낙수(洛水, 현 섬서성 중부) 북방에서 험윤(玁狁)이라는 유목민을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秦, 서기전 900년경~서기전 206년) 목공(穆公, 서기전 659~621년) 때에 롱(隴) 서쪽에는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등의 융(狁)이 있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의 융(狁)이 있었다고 한다.
또 진(晉, 서기전 1042~376년)의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었고, 연(燕, 서기전 1046~222년)의 북쪽에는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었다고 한다. 백여 개의 융(狁)이 있었는데, 통일되어 있지 않았으며, 각자 흩어져 계곡에 살며 각자의 군장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상기한 롱(隴),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 등의 위치를 『대청광여도』에서 찾으면,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롱, 기산, 양산, 칠수, 경수 등





또 진(秦)의 도읍지 함양(咸陽), 진(晉)의 도읍지 곡옥(曲沃)과 강(絳),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 등의 위치는 각각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11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의 본래 위치는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즉, 연도(燕都)의 위치는 현재까지 현 북경시로 알려져 있으나,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상기한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 임호(林胡), 누번(樓煩),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이 ‘흉노(匈奴)’의 직계 선조라는 기록은 별도로 없다.
‘흉노(匈奴)’란 용어는 『사기』 진본기(秦本紀)에 처음 나타나는데, 진(秦, 서기전 900년경~서기전 206년) 혜문왕 7년(서기전 318년)에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濟) 등 5개국이 흉노를 거느리고 함께 진(秦)을 공격했는데, 진(秦)이 이들을 무찌르고 팔만 이천 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서기전 221년에 진(秦) 영정(嬴政)이 전국시대 6개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 서기전 221~210년)가 되던 시기에 북방에서도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었는데, ‘흉노(匈奴)’의 선우(單于)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두만(頭曼) 선우의 아들 묵돈[冒旽, 묵독(墨毒), 묵돌(墨突), 서기전 209~174년)이 선우가 되었으며,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도읍지를 선우정(單于庭)이라고 불렀는데, 대(代)·운중(雲中)의 땅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대(代)의 본래 위치는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심원(沁源)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서기전 200년에 ‘흉노(匈奴)’의 묵돈(冒旽, 서기전 209~174년) 선우(單于)와 한(漢) 고조 유방은 평성(平城)과 백등산(白登山)에서 전쟁을 했다고 한다. 평성(平城)은 현재의 산서성 임분시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등산(白登山)은 임분시 동북쪽에 있는 현재의 곽태산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위치는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평성(平城)과 백등산(白登山)이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 인근에 있었던 것처럼 변이되어 있다.


[그림 3] 평성, 백등산, 대 등 변이된 위치와 본래 위치



묵돈(冒旽, 서기전 209~174년) 선우(單于)에 이어서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서기전 174~160년)이 선우가 되었으며, 이어서 노상의 아들 군신(軍臣, 서기전 160~126년)이 선우가 되었다.
묵돈(冒旽)과 노상(老上)이 선우(單于)이던 시기에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월씨(月氏)를 공격하여 누란, 오손, 호게, 근린 등 26개국을 평정하여 모두 흉노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군신(軍臣) 선우(單于)의 태자 어단(於單)은 군신의 아우 이치사(伊稚斜, 서기전 126~114년)로부터 공격을 받고 선우(單于) 자리를 빼앗기자 도망쳐서 한(漢)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한(漢) 무제(武帝) 유철(서기전 141~87년)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올랐으며, 월씨(月氏)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월씨로 파견(서기전 139~126년)하였다고 한다.
서기전 129년, 124년, 123년, 121년에는 한(漢)과 흉노(匈奴)간에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며, 서로 수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漢)은 서기전 115~73년경 사이에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 돈황 등 하서지구에 사군(四郡)을 확보하였으며, 서기전 109~108년에 조선(朝鮮)을 공격하여 낙랑, 현도, 임둔, 진번 등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朝鮮)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을 위사(僞史)로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하서지구에 사군(四郡)을 두었다는 기록도 위사(僞史)가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튼 이치사(伊稚斜) 선우(單于)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오유(烏維, 서기전 114~105년)와 오유의 아들 아(兒, 서기전 105~102년)가 선우를 이어갔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또 오유의 아우 구려호(句黎湖, 서기전 102~101년)와 차제후(且鞮侯, 서기전 101~97년)가 선우를 이어갔으나, 이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이어서 차제후(且鞮侯)의 아들 호록고(서기전 97~85년)와 호록고의 아들 호연제(서기전 85~68년)와 호연제의 아우 허려권거(虛閭權渠, 서기전 68~60년)가 선우를 이어갔으나, 그 후에는 아(兒, 서기전 105~102년)의 아들 악연구제(握衍朐鞮, 서기전 60~58년)가 선우가 되었다.
그 후, 다시 허려권거의 아들 호한야(呼韓耶, 서기전 58~31년)가 선우가 되었는데, 이어서 호한야의 여섯 아들 복주루(復株累, 서기전 31~20년), 수해(서기전 20~12년), 차아(서기전 12~8년), 오주류(烏珠留, 서기전 8~서기후 13년), 오루(13~18년), 호도이시도고(呼都而尸道皐, 18~46년)가 차례로 선우를 이어갔다.
또 이어서 호도이시도고의 아들 오달제후(46년)와 오달제후의 아우 포노(46년~?)가 선우를 이어갔다.
그런데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호한야(서기전 58~31년) 선우(單于)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금와(金蛙) 왕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에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으나, 지황[地皇, 왕망(王莽) 신(新) 연호, 20~23년] 3년 임오(壬午, 22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無恤, 제3대 대무신왕(재위: 18~44년)]이 이를 치고 왕 대소(帶素)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부여 금와(金蛙) 왕이 흉노(匈奴) 호한야(서기전 58~31년) 선우(單于)라면,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누구인가?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허려권거(虛閭權渠, 서기전 68~60년)의 아들이므로 허려권거가 해부루여야 하겠는가?
아니면 가장 윗대로 올라가서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 선우(單于)를 해부루로 볼 수 있겠는가?
또 금와(金蛙) 왕의 태자 대소(帶素)는 호한야(呼韓耶) 선우의 첫째 아들 복주루(서기전 31~20년)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호한야(呼韓耶) 선우의 여섯째아들 호도이시도고(呼都而尸道皐, 18~46년) 선우가 대소(帶素)인 것인가?
즉, 상기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22년에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부여왕 대소(帶素)가 죽었다고 한다.
또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후한서』 남흉노전과 오환선비전에 따르면, 후한 건무 22년(서기후 46년)에 흉노와 오환(烏桓)이 전쟁을 했는데, 흉노 호도이시도고 선우가 죽었다고 한다.
비록 두 기록 간에 년도의 차이가 있으나, 기록상의 오류이거나 의도적으로 바꿔 적은 것으로 추론할 수 있으므로 호한야(呼韓耶) 선우의 여섯째아들 호도이시도고(呼都而尸道皐, 18~46년) 선우가 금와(金蛙) 왕의 태자 대소(帶素)인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22년에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대소(帶素)가 죽었으나, 부여가 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더욱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文咨王) 3년(494년) 2월에 부여의 왕과 왕비, 왕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무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이며 상징적이므로 곧이곧대로 기록된 데로만 이해하려고 할 일은 아니다. 그 대신에 행간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부여(夫餘)왕 해부루(解夫婁)가 늙도록 아들이 없었으나 큰 연못가(鯤淵, 곤연)에서 금빛 개구리 모양의 어린아이를 얻어 이름을 금와(金蛙)라고 했으므로 금와왕은 고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호한야(呼韓耶) 선우의 부친이 허려권거(虛閭權渠, 서기전 68~60년)의 아들이므로 고아인 금와(金蛙)가 결코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될 수 없다고 단정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허려권거(虛閭權渠) 선우가 해부루의 부친이라고 하기 보다는 맨 윗 대로 올라가서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 선우를 해부루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앞서 14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해모수(解慕漱)가 북부여를 건국한 시기는 서기전 714년, 654년, 또는 594년 등 춘추시대(春秋時期, 기원전 770~403년)라고 추정할 수 있었는데, 해부루가 동부여를 세운 시기를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 선우보다 앞선 시기로도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 태학(太學)
글쓴이 : 광화세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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