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살수(薩水)《朝鲜赋》一卷,明董越撰
0.살수(薩水)
《朝鲜赋》一卷,明董越撰/(弘治三年十二月八日/ 1490年 12月 8日)
而渡大定, (江名,在博川郡,即古朱蒙, (「朱蒙」,原作「未蒙」,據明朱當■〈氵眄〉國朝典故本、清四庫全書本改。) 南奔至此,魚鱉成嬌處。又接博川江。) 其山雖有天馬、 (山名,定州鎮山。) 鳳頭之■〈山上集下〉嶪, (鳳頭即嘉山郡鎮山。自鴨緑東行,惟嘉山嶺最高。其嶺有曰「曉星」、曰「望海」,皆為使節所經之處。) 而安州又倚乎潺湲。 (安州城下瞰薩水,上有百祥樓,即隋師伐高麗時敗績處,又名清川江。在城內有安興舘。) 郡肅川而邑順安,勢皆不於原野;樓肅寧 (肅寧舘前有樓。) 而舘安定, (舘名,屬順安縣。) 地乃稍就寬閑。惟彼西京,地最夷曠,隨勢命名,是曰平壤。爰自有國,已高築臨水之維城;曾幾何時,又近移北山之疊障也。 (平壤,城最古,箕子初封時已有之。至高句驪,又病其不據險,復就城北增築大城。東瞰大同江,北接錦繡山。箕子後,傳至漢有名準者,為燕人衞滿所逐,徙都馬韓之地,今無後焉。)
※大定縣/遼置, 爲中京大定府治, 金因之, 元爲大定路治, 明初廢, 在今河北省平泉縣故大寧城內.
대정(大定)을 지나는 곳에 강 이름으로 박천군(博川郡)에 있다. 바로 옛날 주몽(朱蒙)이 남으로 달려오다가 이곳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래서 또 박천강(博川江)이라고도 한다. 그 산으로서 비록 천마(天馬) 산 이름으로 정주(定州)의 진산이다. 봉두(鳳頭)의 놓은 산이 있지만, 봉두는 곧 가산군(嘉山郡)의 진산이다. 압록강에서 동으로 가면 오직 가산령(嘉山嶺)이 가장 높다. 그 재에는 효성(曉星)과 망해(望海)란 곳이 있는데, 모두 사절(使節)들이 지나는 곳이다. 안주(安州)가 또 졸졸 흐르는 강물에 의지하고 있다. 안주성에서 살수(薩水)를 내려다보면 위에 백상루(百祥樓)가 있는데, 곧 수(隋) 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치다가 패한 곳이다. 이 강을 또 청천강(淸川江)이라고도 하며, 성 안에는 안흥관(安興館)이 있다. 군(郡)으로는 숙천(肅川)이 있고, 읍(邑)으로는 순안(順安)이 있는데, 지세는 모두 들판에 있지 않다. 누(樓)는 숙녕(肅寧) 숙녕관 앞에 누각이 있다 이고, 관(館)은 안정(安定) 관의 이름으로 순안현에 속해 있다. 인데 지대는 조금 널찍하고 조용한 편이다. 오직 저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만은 지대가 가장 평탄하고 넓기 때문에, 그 지세에 따라 이름을 평양(平壤)이라 하였다. 여기에 나라가 생길 때부터 이미 물을 임해서 성을 높이 쌓았는데, 얼마를 지내다가 또 가까운 북쪽 산의 험한 곳으로 옮겼다. 평양성은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자가 처음 봉해질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이다. 고구려에 이르러서는 또 그것이 험한 곳에 의거하지 않은 것을 흠으로 여겨서, 다시 그 성 북쪽에 한 성을 쌓았는데, 동으로는 대동강(大同江)이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금수산(錦繡山)이 닿아 있다. 기자 이후로 전승하여 동한(東漢)에 이르러, 준(準)이란 사람이 연(燕) 나라 위만(衛滿)에게 쫓기어 마한 땅에 도읍을 옮겼으나, 지금은 자취조차 없어졌다.
朝鲜纪事 中
乙未,良策起程,四十里至车辇馆,钱山郡事某设宴。过五十里至林畔馆,通训大夫、定州牧使洪益生,宣州郡事吴仲宇设宴,宿。
丙申,林畔起程,四十里至云兴馆,郭山郡事崔润玉设宴。过五十里至新安馆,随川郡事某、博川郡事郑得孙设宴,宿。
丁酉,新安起程,七十里至嘉平馆,嘉山郡事某设宴。过五十里至安兴馆,王遣礼曹参判李边来问安,设宴。盛饰女乐三十余辈,两行,各抱乐器升堂跪。边进云:「此奉王命,自京携至以奉欢。」峻辞却之,退。侍宴者平安道都观察使韩确、安州牧使朴以宁。宴罢,边辞回复命,偕确同往,有却乐诗。宿。
0.살수의 위치/ 출처 http://cafe.daum.net/djht03
다음 살수는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그 유명한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기사를 통해 살수의 대략적인 위치를 알수 있다. 즉 우문술의 隨軍이 압록수에서 고구려군을 쫓아 살수를 넘어 평양성에서 30리 되는 곳에 이르자 을지문덕은 「그대의 신책은 천문을 궁구했고..족한줄 알고 그만둠이 어떠하리」라는 시를 보낸다. 그러자 隨軍이 달아나는데 살수에서 고구려군이 맹공격을 퍼붓는다. 이에 隨軍이 하루 낮밤동안 450리를 달아나 압록수에 도달했다고 한다. 즉 압록수와 살수의 거리는 450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 隨書는 고구려전에서 「군량이 떨어지고 여러번 패한 병사들이 지쳐 있어서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하였다」고 간단히 적고 있지만 자치통감 隨紀는 「一日一夜至鴨綠水,行四百五十里」라 해서 삼국사기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살수는 압록수가 어디인가에 따라 그 위치가 결정된다.
신당서는 「압록수가 국내성의 서쪽을 거쳐 염난수와 합류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흘러 안시를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고 적고 있어서 이 압록수가 요하의 지류인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자치통감은 隨軍이 압록수에 모였다고 기록한 뒤 이 압록수에 대해 주하기를「班志:玄 郡西蓋馬縣有馬 水。新唐書:馬 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綠水。平壤城在鴨綠東南。金人謂鴨綠水爲混同江。杜佑曰:鴨綠水闊三百步,在平壤西北四百五十里,遼水東西四百八十里」라 해서 '班志는 현도군 서개마현에 마자수가 있다'고 했고 '신당서는 마자수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색이 오리머리와 비슷하다 해서 압록수라 한다. 평양성이 압록수 동남쪽에 있다. 金나라인들은 압록수를 혼동강이라 한다'고 했으며 '두우은 이르기를 압록수 너비는 300보이며 평양 서북쪽 450리에 있고 요수 동서 480리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班志의 현도군 서쪽이라 하면 지금의 요하나 요서지방을 가리키는데 그곳에 마자수, 즉 압록수가 있다고 하니 이 마자수(압록수)는 마치 요하의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압록수를 혼동강이라고도 했다는 신당서 기록을 보면 압록수는 지금의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요수 東西 480리라는 두우(통전)의 기록이 요수 東이나 東南의 오기로 보면 압록수가 평양 서북쪽 450리에 있으며 요수 동쪽 480리에 있다는 두우(통전)의 기록도 지금의 압록강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또 자치통감은 唐紀에서 唐 정명진의 군사가 압록수에 이르렀다는 대목에서 압록수에 대해 주하기를 「杜佑曰:鴨綠水,源出靺鞨長白山,漢書謂之馬 水」라 해서 압록수는 그 수원이 말갈 장백산에서 나온다고 해서 지금의 압록강을 가리키고 있다.
결국 압록수는 지금의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해 보인다. 그렇다면 압록강 동남쪽 450리에 있다는 살수는 현 통설처럼 청천강으로 봐야 한다. 따라서 韓國人들이 낙랑에 내부했다는 후한서 기록은 지금의 청천강 이남 韓人들이 낙랑에 내부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만 압록수가 지금의 요하나 그 지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이는 신당서와 班志의 기록이 있으므로 이에 대한 가능성만은 남겨놓고자 한다.
다음으로 살수 이남 낙랑군 기록 외에도 한반도내 낙랑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는 기록으로 구당서의 「고구려의 도읍은 평양성이다. 漢 낙랑군의 옛 땅이며 경사의 동쪽 5100리에 있다」는 귀절과 신당서의 「고구려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하는데 漢때의 낙랑군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에서 보면 고구려의 평양성은 대동강변 평양을 가리키며 고구려 대무신왕때 청천강 이남이 낙랑군에 내부했으므로 漢 낙랑군이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구려 평양은 대동강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곳에 있었다. 학계는 고구려 장수왕이 수도를 대동강변 평양으로 옮겼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사서 기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주고 있다.
0.해동역사(海東繹史)/고구려(高句麗) 中
○ 태조왕(太祖王) 4년(56) -광무제 32년- 에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삼고, 지경을 개척하여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 청천강(淸川江))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