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한사군 그 논리의 모순
漢武帝(한무제)가 조선을 멸하고 그 땅에 설치 햇다는 漢四郡.
과연 한사군은 우리 국사가 가르치는 그 위치에 존재 해던 것일까요?
우리 역사만의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 고대사는
그 위치 선정이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 필자의 확고한 생각입니다.
동아시아 고대사 모두가 북쪽으로 3천리 정도로 끌어 올려져서 해석되는 현실 속에서
방대한 대륙의 역사를 어디서 부터 손을 대야 하는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漢四郡의 위치로 보는 樂浪
일단 漢나라가 조선을 멸하고 설치 했다는 한사군(한군현)을 더듬어 보자구요.
분명한 것은 한무제가 멸한 조선은 위만 조선이 분명 합니다.
전 글에서 단군 조선과 기자 조선 그리고 위만 조선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설명 드렷지요.
필자는 단군 조선은 지금의 랴오허 이북의 동북 지구 즉 말갈을 단군조선이라고 생각 하며
산서성 일대의 기자조선과 산동반도와 하북성 일대의 위만 조선으로 조선을 구분 합니다.
황당할 수도 있는 제 주장에 화를 내시는 분들도 계시리라 생각 합니다.
우리 국사는 단군조선과 기자 조선 그리고 위만 조선을 시기별로 나누지만
숙신과 기자조선 그리고 위만 조선은 우리 국사가 주장 하는 것처럼
그 시기가 그렇게 차이가 나는 나라들이 아닌것 만은 분명하지요.
일본은 기자 조선과 단군 조선과 위만 조선의 존립 시기가 겹치자
기자 조선의 존재를 부정 하기에 이르지요.
또 한 肅愼(숙신)이라는 분명한 역사를 위만 조선의 고대 조선으로 설정을 하지요.
肅愼이라는 한자 표현을 우리가 읽으면 "숙신" 이지만
이것을 중국인이 읽으면 "조선"이라고 발음 합니다.
왜 이렇게 동아시아 역사가 난해한 가는 <삼국사기>를 해석하는 프레임이
일제의 반도사관에 기인하는 것이며 일제는 <삼국사기>의 내용을
교묘하게 모두 한반도로 축약하여 해석하는 것이지요
<三國史記>는 김부식에 의해 저술 되엇지만 ,현존하는 <삼국사기>는
김부식이 쓴 원본이 아니라 사대주의가 절정에 달하던 조선 중종 때
무려 다섯 차레나 개정과 수정을 거듭한 책이라는 것을
이해 하시고 <삼국사기>를 이해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漢四郡을 중국 백과 사전에서 찿으면 우리 국사가 가르치는 그대로 입니다.
이제 중화인민공화국이 말하는 한사군을 찿아 떠나 보지요.
漁陽縣 : 秦朝至唐朝常设的郡级行政区划,包括今天北京市、天津市、河北省部分地区。
어양현 : 진조와 당조 사이애 설치되엇던 행정구역이며
지금의 북경시 천진시 하북성의 부분을 포괄 한다
위만조선의 우거왕때의 재상이 路人이며 로인은 어양현 사람이라고 하며
<사기>는 이들이 戎狄(융적)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도
위만 조선은 흉노로 이루어진 나라임을 알 수 있으며
우거가 망명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양현은 위만 조선의 영토라는 말이 되지요.
平州 : 东汉时于东北方仅设幽州;汉献帝时,公孙度自称为平州牧。
평주 : 동한때 유주의 동북방에 설치 ; 한 헌제때 공손도가 자칭 평주목이라 하엿다.
중국이 말하는 평주와 유주의 위치가 얼마나 허구 인지는 요동을 설명할 때
그 위치를 정확하게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유주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북쪽임을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물론 이 역사 지도도 중국의 일방적 주장이며
유주의 실제 위치는 산서성 일대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그래도 일단 중국이 주장하는 대로 역사를 구성해 보지요.
위 지도는
三国曹魏分辽东郡、昌黎郡、玄菟郡、带方郡、乐浪郡五郡为平州,之后又合并为幽州。
삼국 조위가 요동군 , 창려군, 현토군, 대방, 낙랑군을 평주라 햇다가 그 뒤 유쥬에 포함 햇다.
위 지도대로라면 다른 곳은 몰라도 창려군 만큼은 위 지도상의 위치에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한사군과 요동군을 포함한 지역을 조조때 평주라 했다가 그뒤 유주에 포함 햇다는군요.
그렇다면 이 지도는 조조가 평주를 유주로 포함 시킨 이후의 지도라는 말이며
동아시아 역사가 주장하는 한나라 시절에 설치 했다는 한사군의 위치와는
다르다는 말이 됩니다.
즉 이 시기의 郡이라는 단위는 만만한 범위가 아니며 이 시기의 동북방은
그야말로 변방중의 변방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 하는 만큼 세분화 하여 郡을 나누는 것은
그야 말로 균형 잡히지 않은 역사 해석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요동군과 한사군을 포함한 지역을 평주라 햇으며
평주와 유주를 통합한 지역이 위 지도상의 유주라고 하는군요?
그렇다면 왜 이러한 지도가 작성 되는 것일까요?
이유는 간단 합니다.
창령군은 안에 지금의 진황도가 존재해야 하는데 동아시아 역사는 진황도를
위 지도위 위치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평주와 통합된 유주의 범위가 그야 말로 일개 郡만한 지역으로 몰아넣고
모두 해석되는 역사의 그림이 되는 것이지요.
아주 분명한 팩트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 대로 위 지도로 유주의 범위를 인정한다 해도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일 수 없다는 것이며 요동의 위치 역시
지금의 요동반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西晋咸宁二年十月,分昌黎、辽东、玄菟、带方、乐浪等郡国五置平州。
서진 함저 2년 평주를 창려, 요동, 현토, 대방, 낙랑등 5개군으로 나누엇다.
조조 때 유주에 포함 되었던 평주를 함저 2년(277년)
다시 5군으로 나누어 원 위치 시켰다는 기록 입니다.
왜 이렇게 秦朝와 漢朝 그리고 曹魏와 西晉은 요동군과 漢四郡을
다른 君과 통합과 분리를 반복 해야 했을까요?
统县二十六,户一万八千一百。
총현이 26, 호가 1만8천1백
영가의 화를 당한 뒤인 (오호)십육국 시기에 모용연에게 점거 당햇다.
평주는 모용연에게 점거 당하면서 모용연의 영토가 된다는 기록 입니다.
즉 모용연을 중국 정통 역사로 보지 않고 북방 오랑캐라는 인식의 역사관이기 때문에
점거라는 표현으로 역사를 기록 하는 것이지요.
위 지도는 모용연의 영토를 그린 지도 이며 모용연은
이 때 북쪽에서 남쪽으로 영역을 넓히는 시기와
중국이 주장 하는 묘용연이 평주를 점거하는 때와 묘한 일치를 보입니다.
역사의 진실릉 뒤로 미루더라도 분명한 것은 중국의 주장을 보면
평주는 지금의 랴오허를 절대로 북쪽으로 넘지 않느다는 것이지요.
또한 영가의 화 또는 영가의 난이란 팔왕의 난과 대기근으로
농민들의 반란이 한창이던 때, 산서성 지역의 흉노족 유연이 漢을 세웁니다.
중국 역사는 팔왕의 위치를 위와 같이 설정 하고 있지요.
이와 같은 역사는 중국 역사의 춘추필법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柔然은 흉노의 재기를 꾀하며 西晉의 수도 낙양을 공격했으나 실패한 뒤 병사했고,
이어서 아들 유총이 낙양을 공략 하지요.
위 지도는 중화인민공화국이 그린 柔然의 지도 입니다.
낙양성 함락에 성공한 유요와 석륵 등이 왕공과 백관, 백성 3만여 명을 죽이고
회제를 平壤으로 압송해 살해하자 이는 서진의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이때 부터 五胡十六國 시대가 개막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연의 도읍지가 평양이라는 군요.
西晉(서진)의 도읍지인 낙양을 지키던 팔왕들은 소위 서진의 친족들로서
낙양 근방의 8개국을 말하는 것이며 팔왕의 존재 이유가 西晉의 都邑地를 방위 하던
일종의 수도 경비 사령부로서의 역할 입니다.
만약 팔왕의 위치가 위 그림과 같다면 유사시에 어떻게 洛陽을 지킬 수가 있을까요?
즉 서진은 고대 중원으로 불리던 화북에 영토를 둔 나라 입니다.
즉 아래의 갈색 지역을 벗어 나지 못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동아시아 역사는 서진의 영역을 아래 지도로 그리고 잇지요.
적어도 화남과 장강 일대는 서진이 멸망하고 동진 시대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개발 되는 것이며 그 이전에는 밀림이 우거져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엇음을 모르고 역사를 쓰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국 역사의 풍선 불기의 실체 입니다.
중국 역사의 "풍선 불기"는 한나라의 역사에서 여실히 드러 납니다.
위 지도는 한나라의 영토를 그린 지도 입니다.
중국 전역이 한나라 영토로 그려져 있지요?
한나라 초기의 인구는 500만 정도로 추정 되며
전성기때에는 4천만 정도라고 추정 합니다.
그런 인구를 위 지도의 영토를 모두 통치 햇다는 것이며
한반도 역시 한의 영토로 돼 있지요?
그러나 遼東의 실제 위치를 이해 하고 나면 한의 영토는 북쪽으로는
황하를 절대로 넘지 못햇으며 남으로는 지금의 淮水를 절대로
越江하지 못햇음을 알게 됩니다.
서진의 실제 영토는 위 지도의 범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위 지도는 慕容燕國 즉 慕容皝(모용황)이 고구려를 쥐 잡듯 하던 때의 영토라고 하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때의 모용연은 山西省 일대를 벗어 나지 못햇습니다.
313年,高句丽攻陷乐浪郡後,东夷校尉将平州迁至辽西的昌黎郡。
313년 고구리의 공격으로 함락되어 낙랑군이
요서적 창려군이 평주로 옮기면서 .요동교위가 거느리게 되었다.
바로 이 부분이 호동왕자의 꼬임에 빠진 낙랑공주가 자명고를 찢엇다는 그 때 입니다.
북위와 북연에 의해 요서와 북평 2군으로 나누어 지면서 소멸 되엇다.
요동이라는 지명이 요동과 요서로 나누어 지는 때가 북위에 의해서라는 것이지요.
즉 이때의 요서는 북위의 핵심 영토라는 말입니다.
요서는 지금의 산서성 서쪽 즉, 산서성을 남북으로 가로 지르는
지금의 분하의 서쪽을 말하는 것이지요.
決論
결론은 중국이 주장하는 대로 역사를 구성 한다 해도
한반도 북부에 있다고 굳게 믿고 잇엇던 한사군의 위치가
위 지도의 유주에 있다고 인정 한다 해도 한사군은
지금의 하북성에 존재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은 지금의 중국 주장입니다.
그동안 필자는 요서의 위치가 지금의 황하 중류를 남북으로
길게 흐르는 곳을 기준으로 요서와 요동이라고 생각 햇었는데
한사군과 요동을 나누어 遼西와 北平이라 햇다는 것입니다.
또한 북평을 요서와 대비되는 말로 "右北平"이라고도 하는데
우북평은 지금의 북경 일대라는 것이지요.
결국 北魏와 北燕 시대 이전에는 지금의 하북 지방의 이름이 요동이라 햇던 것이며
이후 북위와 북연에 의해 "遼西"라는 이름이 처음 생긴 것입니다.
즉 이 기록들을 토대로 낙랑군을 비정하면
漢代의 낙랑의 위치는 하북성 중북부로 옮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북성 중북부는 거대한 늪(沛)를 찿을 수가 없습니다.
樂浪=浿水(沛水)이기 때문에 沛水 없는 낙랑은 허구이거나
하북성의 낙랑군은 <사기>의 낙랑과 또 다른 樂浪이 있다는 것일까요?
옛 중국의 地名을 나타내는 漢字는
그 글자 자체에서 변하지 않는 固有性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地名을 나타내는 글자 뒤에 州나 縣 郡과 같은 것이 오지 않더라도
그 地名 하나만을 위해 만들어진 固有한 글자가 존재 합니다.
특히 물 水변이 들어가는 古代의 地名을 나타내는 글자는 거의 변하지 않고
오늘날 까지 전해 집니다.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 고대사와 관련된 기록은
모두 누락 시켜 놓은 상태 입니다.
거대한 浿水 없는 樂浪은 모두 거짓이지요.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 역사는 모두 거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