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동훈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와 니콜라이 클류예프 러시아과학원 극동연구소 선사고고실장이 ‘ㄴ’자로 꺾인 석렬을 가리켰다. 한민족 온돌의 초기 형태로 발해 시대 ‘쪽구들’의 일부인 부뚜막 유구다. 부뚜막과 연결된 고래는 건물 벽을 따라 죽 이어졌다. 15m 길이의 고래를 따라가 보니 건물 밖으로 거대한 굴뚝 기둥 자리가 보였다.
2006∼2013년 콕샤롭카 성(城) 유적을 조사한 한-러 공동 발굴단은 이곳에서 한 변이 약 10m에 이르는 대형 건물터 7개를 발견했다. 강인욱 경희대 교수(북방 고고학)는 “북방 오지를 개척하며 대제국을 일군 발해의 정체성을 생생히 보여주는 유적”이라고 말했다.
당초 러시아 학계는 콕샤롭카 유적을 발해가 아닌 말갈의 것으로 봤다. 알렉산드르 이블리예프 등 주요 연구자들은 발해 영역을 한카 호수 남쪽까지로 좁게 해석했다. 콕샤롭카를 발해 유적으로 보면 최대 아무르강 유역까지 발해 영역을 확장해 볼 여지가 생긴다.

쪽구들은 발해가 고구려로부터 이어받은 주거문화로 말갈 유적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김동훈 학예연구사는 “고래가 꺾이는 형태나 집 밖으로 굴뚝을 내는 구조 등이 중국에 있는 발해 상경성(上京城) 유적과 꼭 닮았다”고 말했다.
2014년 콕샤롭카 성벽 단면에서 서고성(西古城)과 크라스키노 등 발해 유적에서만 나오는 ‘주사위형 토제품’이 출토된 것도 중요하다. 2012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단을 이끈 홍형우 강릉원주대 교수는 “콕샤롭카 유적은 발해 영역은 물론이고 말갈과 관계를 밝힐 수 있는 핵심 열쇠”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쪽구들을 갖춘 대형 건물터는 콕샤롭카 발굴단에 미스터리를 안겼다. 수도 상경성에 버금가는 건물들을 먼 변방에 지은 이유는 무엇이며, 고대의 다른 대형 건물들과 달리 기와가 발견되지 않는 까닭은 무엇인가.
학계 일각에서는 콕샤롭카 일대 토착민들로부터 모피나 약초를 얻기 위해 발해의 위세를 과시할 수 있는 대형 건물을 지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모피 교역은 주로 겨울에 이뤄지므로 사계절 내내 거주할 필요는 없지만 쪽구들 같은 난방시설은 필요했을 것이다. 강인욱 교수는 “발해는 강성한 당나라에 밀려 고구려에 비해 척박한 땅에서 나라를 시작했지만 거친 북방을 개척해 한계를 극복하고 대제국을 세웠다”고 강조했다.
콕샤롭카=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