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20. 『사기』 흉노열전은 부여사(夫餘史)
20. 『사기』 흉노열전은 부여사(夫餘史)
『후한서』 열전 중에 권 제89는 남흉노열전(南匈奴列傳)이다.
남흉노열전이 있으니 북흉노열전도 있을법한데, 북흉노열전은 별도로 없다. 즉, 권 제87은 서강전(西羌傳)이며, 권제88은 서역전(西域傳)이고, 권 제90은 오환선비열전(烏桓鮮卑列傳)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런데 동이열전(東夷列傳)처럼 각 지역의 열전(列傳)들은 ‘열전(列傳)’이라고 명칭이 붙어 있는데, 서강전(西羌傳)과 서역전(西域傳)은 그냥 ‘전(傳)’이라고 명칭이 붙어 있다.
그러니 서강전(西羌傳)과 서역전(西域傳)은 통째로 갈아꼽은 것이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무튼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사기』 흉노전에 따르면, 진시황(秦始皇) 영정(嬴政)이 장성(長城,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서쪽의 임조(臨洮)에서부터 동쪽으로 요동(遼東)에 이르렀다고 한다.
즉, 장성(長城)의 경계지역에 해당하는 지명으로서 서쪽에서부터 임조·농서·북지·상군·운중·안문·대·조양·양평·상곡·어양·우북평·요서·요동 등 12개 지명들이 기록되어 있다.
또 『후한서』 남흉노전에 따르면, 남흉노의 거주지에 해당하는 북지·삭방·오원·운중·정양·안문·상곡·대군 등 8개 지명이 모두 장성(長城) 남쪽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장성의 북쪽에는 부여(夫餘)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한 지명들의 위치를 청(淸) 대에 제작한 『대청광여도』에서 찾아보면, [그림 1]과 같다.
[그림 1] 장성 경계지역의 지명들(근거: 『대청광여도』, 모두 위사임)
그런데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상기 지명들의 위치는 모두 북쪽으로 1,000~2,500리 변이(變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춘추전국시대(서기전 771~221년) 연(燕)의 연도(燕都)가 마치 현재의 북경시에 있었던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그간 본 연구원이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연도(燕都)의 위치는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이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한(漢, 서기전 206~서기후 220년) 대 유주(幽州)에 속했던 지명들인 상곡, 어양, 요서, 북평, 요동 등의 본래 위치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모두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가 있었던 산서성 남부지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근거는 『요사』 지리지 남경(南京)에 관한 기록과 『신당서』 지리지 안동도호부에 관한 기록이다.
한편, 고구려 부여성의 위치를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주변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그 근거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류왕(榮留王) 25년(642년)의 기록이다. 즉, 연개소문이 천리장성(千里長城)의 구축을 감독했는데,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로서 그 거리가 1,000리에 달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동북쪽에 있는 부여(夫餘)성에서부터 동남쪽에 있는 해(海)까지 1,000리였다고 한다.
그러나 '동북쪽'은 본래 '서북쪽'으로서 ‘동(東)’자가 본래 ‘서(西)’자였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림 3] 천리장성 추정지역
왜냐하면 ‘동북자부여성 동남지해(東北自扶餘城 東南至海)’이 그대로 맞는다고 할 경우에는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위치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어야 하며,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평양성 남쪽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간의 국경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해(海)에서 서북쪽 1,000리 거리에 부여(夫餘)성이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었는데, 해(海)는 고(古) 황하(黃河) 수로(水路)로서 고구려 천리장성의 위치를 [그림 3]과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 부여성이 있었던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와 진중시 주변지역에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가 세운 동부여가 있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아무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고대 국가들의 강역을 북쪽 또는 동북쪽으로 변이시키고, 부여와 조선의 역사를 없애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림 4] 부여의 위치(근거:『후한서』 군국지 및 동이전, 위사임.)
즉, 부여(夫餘)의 경우, 『후한서』 군국지에 따르면, 낙양에서 동북쪽 4,000리 거리에 현도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한서』 동이전에 따르면, 현도에서 북쪽으로 1,000리 거리에 부여(夫餘)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부여의 위치가 [그림 4]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마치 현재의 길림성 장춘시 주변 인근지역에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부여성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부여성이 있었던 위치와 남흉노의 북쪽, 즉, 장성(長城, 만리장성) 북쪽에 있었던 북흉노의 위치가 모두 현재의 산서성 태원시 주변지역으로 밝혀짐으로써 부여(夫餘)가 바로 북흉노였음을 알아챌 수 있게 된 것이다.
<표 1> 각 사서별 외국열전의 권별 분류내용
사 기 | 한 서 | 후한서 | 삼국지 | 진 서 |
흉노 | 흉노 | 동이 | 오환선비동이 | 동이 |
남월 | 서남이양월조선 | 남만서남이 |
| 토욕혼 |
동월 |
| 서강 |
| 흉노 |
조선 |
| 서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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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흉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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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환선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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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사기』 열전 중에는 조선열전이 있으며, 『한서』 열전 중에는 서남이양월조선전이 있다. 즉, 『사기』 와 『한서』 에는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조선열전이 있으나,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는 조선열전은 없어지고 동이열전으로 편집되어 있다.
즉, 『사기』, 『한서』, 『삼국유사』 등에 따르면, 위만조선이 한 무제의 공격을 받아 마치 서기전 108년에 멸망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위만조선)과 한(漢) 무제 유철이 서기전 109~108년 기간 중에 전쟁을 했다는 기록만 뎅그러니 남아있는 꼴이다.
이어서 『후한서』 이후에 조선(朝鮮)에 관한 기록은 사라지고 동이전에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등에 관한 기록들이 남겨져 있는데,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 한 등의 많은 나라들이 마치 조선(朝鮮)이 망한 후에 비로소 새로 생긴 나라들인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즉, 부여에 관한 기록이 『사기』와 『한서』에는 없다. 또 『삼국유사』 에 따르면, 『후한서』를 인용하면서 해모수(解慕漱)가 마치 서기전 59년에 북부여를 흘승골성에서 건국한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표 2> 각 사서별 조선열전(또는 동이열전)의 내용
사 기 | 한 서 | 후한서 | 삼국지 | 진 서 | 위 서 | 북 사 |
조 선 | 조 선 | 부 여 | 부 여 | 부 여 | 고구려 | 고구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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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읍 루 | 읍 루 | 마 한 | 백 제 | 백 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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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 고구려 | 변 한 | 신 라 | 신 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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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옥저 | 동옥저 | 숙 신 |
| 물길(읍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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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 | 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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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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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해서 명(明) 초에 명(明) 대의 사관(史官)들이 부여에 관한 기록을 『사기』와 『한서』에 남기지 않았으니, 조선의 사관(史官)들은 『삼국유사』에 부여에 관한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사기』 화식(貨殖) 열전에 따르면, 전국시대 연(燕)의 주위에 제(濟), 조(趙), 부여, 조선 등이 [그림 5]와 같이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조(趙)는 서기전 403년에 생겨서 서기전 228년에 망했으며, 연(燕)은 서기전 222년에, 제(濟)는 서기전 221년에 각각 망했으므로 [그림 5]의 상황은 최소한 서기전 403~228년 기간 중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부여와 조선은 최소한 서기전 228년 이전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아챌 수 있지 않겠는가?
앞서 18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周, 서기전 1046~256년)의 호왕(虎王, 武王)이 즉위한 기묘(己卯)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였다면, 조선은 이미 서기전 1046년경에 건국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지 않은가?
[그림 5] 『사기』 화식열전
또 해모수(解慕漱)가 건국한 북부여는 서기전 714년, 654년, 또는 594년 중에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해부루가 건국한 동부여는 북부여 이후에 건국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해모수(解慕漱), 해부루, 북부여, 동부여 등은 현재의 중화인민국 25사(史)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삼국유사』에만 기록되어 있다.
다만,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후한서』, 『삼국지』, 『진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 부여(夫餘)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동부여와 내용이 거의 같으나, 부여(夫餘)란 국호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아무튼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당요(唐堯, 요임금)와 우순(虞舜, 순임금) 이전 시기에 여러 종족이 북방의 만지(蠻地)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기전 1,300년 후반 은(殷) 무정(武丁) 시대 갑골문에 토방(土方)이라 불리던 이민족이 변경을 침략하여 주민과 가축을 약탈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周, 서기전 1046~256년) 대 『주례(周禮)』와 『역경(易經)』에 토방(土方), 귀방(鬼方), 마방(馬方)이라고 불리던 종족이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 서주(西周, 서기전 770~256년)) 말 청동기 명문에 험윤(玁狁)이라는 유목민을 낙수(洛水) 북방에서 토벌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또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진(秦) 목공(穆公, 서기전 659~621년) 때에 롱(隴) 서쪽에는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등의 융(狁)이 있었고, 기산(岐山), 양산(梁山), 경수(涇水), 칠수(漆水)의 북쪽에는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의 융(狁)이 있었다고 한다.
또 진(晉, 서기전 1042~376년)의 북쪽에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있었고, 연(燕, 서기전 1046~222년)의 북쪽에는 동호(東胡)와 산융(山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림 6] 롱, 기산, 양산, 칠수, 경수 등
또 진(晉)의 도읍지 곡옥(曲沃)과 강(絳), 연(燕)의 도읍지 연도(燕都)의 위치는 각각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연도(燕都)의 위치는 현재까지 현 북경시로 알려져 있으나,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현재의 산서성 둔유현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상기한 면저(緜諸), 곤융(緄戎), 적(翟), 원(豲) 의거(義渠), 대려(大荔), 오씨(烏氏), 구연(朐衍), 임호(林胡), 누번(樓煩), 동호(東胡), 산융(山戎) 등이 ‘흉노(匈奴)’의 직계 선조라는 기록은 없다.
‘흉노(匈奴)’란 용어는 『사기』 진본기(秦本紀)에 처음 나타나는데, 진(秦, 서기전 900년경~서기전 206년) 혜문왕 7년(서기전 318년)에 한(韓), 조(趙), 위(魏), 연(燕), 제(濟) 등 5개국이 흉노를 거느리고 함께 진(秦)을 공격했는데, 진(秦)이 이들을 무찌르고 팔만 이천 명을 베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기전 221년에 진(秦) 영정(嬴政)이 전국시대 6개국을 멸망시키고 시황제(始皇帝, 서기전 221~210년)가 되던 시기에 북방에서도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었는데, ‘흉노(匈奴)’의 선우(單于)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이 있었다고 한다.
이어서 두만의 아들 묵돈[冒旽, 묵독(墨毒), 묵돌(墨突), 서기전 209~174년)이 선우가 되었다고 한다.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도읍지를 선우정(單于庭)이라고 불렀는데, 대(代)·운중(雲中)의 땅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간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대(代)의 본래 위치는 앞서 19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재의 산서성 심원(沁源)현으로 추정할 수 있었다.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서기전 200년에 ‘흉노(匈奴)’의 묵돈(冒旽, 서기전 209~174년) 선우(單于)와 한(漢) 고조 유방은 평성(平城)과 백등산(白登山)에서 전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평성(平城)은 현재의 산서성 임분시로 추정할 수 있으며, 백등산(白登山)은 임분시 동북쪽에 있는 현재의 곽태산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그 위치는 [그림 7]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이제까지 알려지기로는 평성(平城)과 백등산(白登山)이 현재의 산서성 대동시 인근에 있었던 것처럼 변이되어 있다.
묵돈(冒旽, 서기전 209~174년) 선우(單于)에 이어서 그의 아들 노상(老上, 서기전 174~160년)이 선우가 되었다. 그 후, 노상의 아들 군신(軍臣, 서기전 160~126년)이 선우가 되었다.
묵돈(冒旽)과 노상(老上)이 선우(單于)이던 시기에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월씨(月氏)를 공격하여 누란, 오손, 호게, 근린 등 26개국을 평정하여 모두 흉노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군신(軍臣) 선우(單于)의 태자 어단(於單)은 군신의 아우 이치사(伊稚斜, 서기전 126~114년)로부터 공격을 받고 선우(單于) 자리를 빼앗기자 도망쳐서 한(漢)에 항복했다고 한다.
그 당시 한(漢) 무제(武帝) 유철(서기전 141~87년)은 15세의 어린 나이에 재위에 올랐으며, 월씨와 연합하여 흉노를 공격하기 위해 장건(張騫)을 월씨(月氏)로 파견(서기전 139~126년)하였다고 한다.
[그림 7] 평성, 백등산, 대 등의 변이된 위치와 본래 위치 추정지역
서기전 129년, 124년, 123년, 121년에는 한(漢)과 흉노(匈奴)간에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으며, 서로 수만 명이 넘는 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한(漢)은 서기전 115~73년경 사이에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 돈황 등 하서지구에 사군(四郡)을 확보하였다고 한다. 또 한(漢)은 서기전 109~108년에 조선(朝鮮)을 공격하여 낙랑, 현도, 임둔, 진번 등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조선(朝鮮)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을 위사(僞史)로 추정할 수 있는 것처럼 하서지구에 사군(四郡)을 두었다고 기록도 위사(僞史)로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치사(伊稚斜) 선우(單于)가 죽은 후, 그의 아들 오유(烏維, 서기전 114~105년)와 오유의 아들 아(兒, 서기전 105~102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으나,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났다. 또 오유의 아우 구려호(句黎湖, 서기전 102~101년)와 차제후(且鞮侯, 서기전 101~97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으나, 이들도 모두 일찍 죽었다.
이어서 차제후(且鞮侯)의 아들 호록고(서기전 97~85년), 호록고의 아들 호연제(서기전 85~68년), 호연제의 아들 허려권거(서기전 68~60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으나, 그 후에는 아(兒, 서기전 105~102년)의 아들 악연구제(서기전 60~58년)가 선우(單于)를 되었다.
그 후, 다시 허려권거(서기전 68~60년)의 아들 호한야(서기전 58~31년)가 선우가 되었는데, 이어서 호한야의 여섯 아들 복주루(서기전 31~20년), 수해(서기전 20~12년), 차아(서기전 12~8년), 오주류(서기전 8~서기후 13년), 오루(13~18년), 호도이시도고(18~46년)가 차례로 선우(單于)를 이어갔다.
이어서 호도이시도고의 아들 오달제후(46년)와 오달제후의 아우 포노(46년~?)가 선우(單于)를 이어갔다.
그런데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호한야(서기전 58~31년) 선우(單于)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금와(金蛙) 왕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루가 죽자 금와(金蛙)가 왕위를 이어 왕이 되었다. 다음에 왕위를 태자 대소(帶素)에게 전하였으나, 지황[地皇, 왕망(王莽) 신(新) 연호, 20~23년] 3년 임오(壬午, 22년)에 이르러 고[구]려왕 무휼[無恤, 제3대 대무신왕(재위: 18~44년)]이 이를 치고 왕 대소(帶素)를 죽이니 나라가 없어졌다.”
앞서 17장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부여 금와(金蛙) 왕이 흉노(匈奴) 호한야(서기전 58~31년) 선우(單于)라면,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누구인가?
『사기』 흉노열전에 따르면, 호한야(呼韓耶) 선우가 허려권거(虛閭權渠, 서기전 68~60년)의 아들이므로 허려권거가 해부루여야 하겠는가?
아니면 가장 윗대로 올라가서 흉노(匈奴) 선우(單于)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두만(頭曼, 재위: ?~서기전 209년) 선우(單于)를 해부루로 볼 수 있겠는가?
또 금와(金蛙) 왕의 태자 대소(帶素)는 호한야(呼韓耶) 선우의 첫째 아들 복주루(서기전 31~20년)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금와(金蛙) 왕의 여섯째아들 호도이시도고(呼都而尸道皐, 18~46년) 선우(單于)가 대소(帶素)여야 할 것인가?
즉, 상기한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22년에 부여를 공격하였는데, 부여왕 대소(帶素)가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따르면, 고구려 대무신왕이 22년에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 대소(帶素)가 죽었으나, 부여가 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문자왕(文咨王) 3년(494년) 2월에 부여의 왕과 왕비, 왕자가 나라를 들어 항복해 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많은 내용들이 함축적이며 상징적이므로 곧이곧대로 기록된 데로만 이해하려고 할 일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이 경주되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