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선(朝鮮)을 받아들인 최고(最古)의 고대(古代) 문명국
조선(朝鮮)을 받아들인 최고(最古)의 고대(古代) 문명국
『고려사』에 따르면, 조선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1392년)하기 직전에 동여진(東女眞) 지역의 여러 부락을 초유(招諭, 정책설명)하였으며,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을 선위(宣慰)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391년 9월 22일 전 상원군사(祥原郡事) 이용화(李龍華)를 보내어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을 선위(宣慰, 베풀어 위로함)하게 하였다. 알도리(斡都里)는 곧 동여진(東女眞)이다."
즉, 고려가 동여진(東女眞)을 초유(招諭, 불러서 깨닫게 함)하고 선위(宣慰, 베풀어 위로함)하는 목적은 자국 백성 못지않게 우호적인 관계를 갖기 위하여 회유(懷柔, 좋은 말이나 태도로 구슬리고 달램)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간 고려시대의 주요 지명의 본래 위치를 연구한 결과, 고려의 개경과 서경, 천리장성 등의 위치는 [그림 1]과 같이 추정할 수 있었다.
따라서 동여진의 거주지역은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또는 당산시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현재의 요령성과 길림성 등지로 추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림 1] 고려시대 주요 지명들의 본래 위치 추정지역
그런데 상기한 『고려사』 기록에서 보다시피 알도리(斡都里)는 동여진(東女眞)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올량합(兀良哈)은 어디인가?
『고려사』에는 서여진에 관한 기록이 85건, 동여진에 관한 기록이 310건 남아 있지만,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에 관한 기록은 위 기록외에 아래와 같이 4건에 불과하다.
"1392년 2월 26일 올량합(兀良哈)과 알도리(斡都里) 등이 내조(來朝)하였는데, 사관(舍館)에서 다투었다.
알도리(斡都里)가 말하기를, '우리들이 온 것은 존장을 놓고 다투려고 온 것이 아니다. 옛날에 시중(侍中) 윤관(尹瓘)이 우리 땅을 평정하고, 비석을 세우기를, ‘고려지경(高麗地境)’이라 하였으니, 이제 경내의 인민들이 모두 제군사(諸軍事) (이성계)의 위신(威信)을 사모하여 온 것뿐이다. 비록 제군사(諸軍事) 집의 마구간 옆에 처하더라도 그가 후대한다고 감격할 것인데, 하물며 화려한 집에서 무슨 동서의 차이가 있겠는가? 다만 주상과 제군사를 빨리 뵙고 싶을 뿐이다.'라고 하고는 드디어 다투는 것을 그만두었다."
"1392년 2월 27일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이 궁궐에 이르러 토산물을 바쳤다. 왕이 본디 존장을 두고 다투었다고 들었기 때문에 사자를 보내어 말하기를, '옛말에 이르기를, 산에 나무가 있으면 공인(工人)이 재기 마련이고, 손님의 예를 갖추지 못하면 주인이 판별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무릇 향화(向化)하여 온 자들은 먼저 복종한 자를 존장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올량합(兀良哈)이 드디어 알도리(斡都里)에게 존장 지위를 양보하였다."
"1392년 3월 7일 우리 태조(太祖, 이성계)가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을 위해 집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1392년 3월 19일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의 여러 추장들에게 모두 만호(萬戶)·천호(千戶)·백호(百戶) 등의 관직을 차등 있게 내려주고, 미곡(米穀)·의복(衣服)·마필(馬匹) 등을 하사하니, 여러 추장들이 감읍하여 모두 (우리) 경내로 옮겨와서 번병이 되겠다고 하였다.
또 여러 부락에 방을 붙여 초유(招諭)하기를, '홍무(洪武) 24년(1391년) 7월에 이필(李必) 등을 차출하여 방문을 가지고 여진 지역인 두만(豆萬) 등지에 가서 초유하였다. 올해에 알도리·올량합·만호·천호·두목 등이 바로 귀부하니, 상을 내리고 명분을 하사하여, 모두 각각 본업에 복귀하게 하였다.
소유하고 있는 속빈(速頻)·실적멱(失的覓)·몽골(蒙骨)·개양(改陽)·실련(實憐)·팔린(八隣)·안둔(安頓)·압란(押蘭)·희랄올(喜刺兀)·올리인(兀里因)·고리한(古里罕)·노별(魯別)·올적개(兀的改) 땅은 원래 우리나라의 공험진(公嶮鎭) 경내여서 이미 초유를 하였으나, 지금까지도 귀부하지 않고 있으니 도리에 어긋난다.
이 때문에 다시 이필(李必)을 차출하여 방문을 가지고 가서 초유하게 하니, 방문이 이르는 날에 각각 내귀(來歸)한다면, 상과 명분을 하사하는 것이 모두 바라는 바에 미치게 할 것이며, 먼저 귀부한 알도리(斡都里)와 올량합(兀良哈)의 예와 똑같이 해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고려말에 동북쪽으로 광대한 지역을 회유(懷柔)하여 고려의 군현(郡縣)으로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여러 부락에 방을 붙여 초유(招諭)한 지역이 여진 지역인 두만(豆萬) 등지까지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해(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하였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1392년 7월 17일 내가 수상(首相)이 되어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로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하여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알도리(斡都里)에 관한 기록은 단 2건에 불과하나,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에 관한 기록은 태조(1392년) 때부터 정조(1799년)까지 총 1,088건이 남아있다.
즉, 알도리(斡都里)에 관한 기록은 '산 범[生虎]을 바쳤다.'(1393년)와 '방물(方物)을 바쳤다.'(1396년)는 두 기록에 불과하다.
한편, 조선 태조부터 고종까지 여진(女眞)에 관한 기록은 동여진(8건)을 포함하여 총 512건이 기록되어 있으나, 서여진에 관한 기록은 일체 없다.
그런데 여진(女眞)에 관한 기록과는 별도로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에 관하여 태조(1392년) 때부터 정조(1799년)까지 총 1,088건이 기록되어 있다.
여진(女眞)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동여진으로서 현재의 요령성, 길림성 등 두만[豆萬, 현재의 두만강(豆滿江)으로 추정)에 이르는 지역에 살았던 종족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도대체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은 어디인가?
아무튼 조선 건국 초기에 태조 이성계가 즉위하자마자 천도할 도읍지의 지세를 조사하고 평양에 성을 쌓고 한양(漢陽)으로 천도하는 시기에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에 관한 기록들은 아래와 같다.
"1392년 8월 13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령을 내려 한양(漢陽)으로 도읍(都邑)을 옮기게 하였다."
"1392년 8월 15일 올량합(兀良哈)이 왔다.
삼사 우복야(三司右僕射) 이염(李恬)을 한양부(漢陽府)에 보내어 궁실(宮室)을 수즙(修葺)하게 하였다."
"1392년 9월 11일 임금이 조회를 보았다. 유구국(琉球國)의 사신과 오량합(吾良哈)의 사람들이 조회에 참여하였다.
유구국의 사신은 동반(東班) 5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오량합은 서반(西班) 4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고, 그 종자(從者)들은 6품의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유구국에서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1392년 9월 24일 올량합(兀良哈)에게 의복을 내려 주었다."
"1392년 윤12월 14일 올량합(兀良哈)이 와서 방물(方物)을 바치었다."
"1393년 1월 6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 명하여 평양에 성을 쌓게 하였다."
"1393년 1월 19일 임금이 송경(松京)을 출발하여 계룡산(鷄龍山)의 지세(地勢)를 친히 보고 장차 도읍을 정하려고 하니, 영삼사사(領三司事) 안종원(安宗源)·우시중(右侍中) 김사형(金士衡)·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이지란(李之蘭)·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 남은(南誾) 등이 따라갔다."
"1393년 2월 27일 임금이 계룡산(鷄龍山)으로부터 이르니, 백관(百官)들이 용둔(龍屯) 들에서 맞이하였다. 임금이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오니 채붕(綵棚)과 나례(儺禮)를 시좌궁(時座宮) 문밖에 설치하였다. 성균관의 학관(學官)이 여러 유생(儒生)을 거느리고 가요(歌謠)를 불러 올렸다."
"1393년 5월 16일 오랑합(吾郞哈) 5인에게 의복을 각기 한 벌씩 내려 주었다."
"1393년 5월 17일 중추원(中樞院)에서 교지를 받들어 오량합(吾良哈) 궁부대(宮富大)를 동량(同良) 등처(等處) 상만호(上萬戶)로 삼고, 직첩(職牒)을 주면서 말하였다. '모든 일을 공정하고 근실히 하여 해이(解弛)하지 말게 하라.'"
"1393년 11월 11일 오랑합(吾郞哈)이 왔다."
"1393년 12월 16일 오랑합(吾郞哈) 10여 인에게 면포(緜布)로 지은 옷을 내려 주었다."
"1394년 8월 8일 임금이 친히 무악(毋岳)의 천도(遷都)할 땅을 보려고 도평의사사와 대성(臺省)·형조의 관원 각각 한 사람씩과 친군위(親軍衛)를 데리고 갔다."
"1394년 10월 25일 한양(漢陽)으로 서울을 옮기었다. 각 관청의 관원 2명씩은 송경(松京)에 머물러 있게 하고, 문하 시랑찬성사 최영지(崔永沚)와 상의문하부사 우인열(禹仁烈) 등으로 분도평의사사(分都評議使司)를 삼았다."
즉, 조선이 건국(1392. 7)되고 도읍지를 한양(漢陽)으로 천도(1394. 10)하던 조선 초기의 기록 중에 여진(女眞)의 활동에 관한 특별한 기록은 없다.
그대신 상기한 바와 같이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에 관한 기록들이 나타나는데, 비록 조선이 도읍지를 계룡산(鷄龍山)으로 할 것이지, 무악(毋岳)으로 할 것인지, 한양(漢陽)으로 할 것인지 오락가락했지만, 도읍지가 어디이든지 간에 조선의 도읍지가 들어설 수 있도록 받아드린 현재의 우리나라 땅은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일 수가 있지 않겠는가?
만약 올량합(兀良哈)의 땅이 아니라면, 여진(女眞)의 땅이었을까?
아무튼 이 땅은 최고(最古)의 고대(古代) 문명국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는가?
즉, 최고(最古)의 벼농사 볍씨가 발굴된 땅이 아닌가?
혹자는 현재의 우리나라 땅에서 15,000년전 재배종 볍씨가 발굴되어 세계 최고(最古)의 벼농사 지역으로 국제 공인되었다고 하지만, 이 것 한 가지만 가지고 최고(最古)의 고대(古代) 문명국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냐고 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간 세계적인 고고학자들이 고대(古代) 최고(最古)의 벼농사 볍씨를 찾기를 염원한 이유는 세계 인류의 60% 이상이 쌀을 주식으로 하기 있기 때문에 최고(最古)의 벼농사 지역은 인류 문명의 시발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최고(最古)의 벼농사 지역으로 알려졌던 지역들은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다.
[그림 2] 최고(最古)의 벼농사 지역
즉, 이제까지 국제적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인정받아 왔던 중국 강서성 선인동(仙人洞) 동굴에서 출토된 볍씨의 10,500년, 또는 호남성 도현 옥섬암 동굴유적에서 출토된 볍씨의 11,000년보다 대략 3,000년을 더 앞선 세계 최고(最古)의 볍씨가 1994~2001년 기간 중에 우리나라 충북 청원군 소로리 일대에서 출토되었다.
흙속에 묻혀있는 볍씨를 발굴하기 위해서는 흙을 채로 쳐서 걸러지는 알갱이들을 현미경으로 하나하나 조사해서 볍씨를 찾아내야 하는 일인데, 소로리에서 출토된 볍씨들을 서울대학교 AMS(방사선탄소연대측정) 연구실과 미국의 지오크론(Geochron Lab.) 연구실에서 교차 측정한 결과, 1만 3,000년~1만 5,000년 전의 절대 연대값을 얻게 되어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임이 판명되고 국제적으로 공인되었다.
소로리 볍씨는 현재의 우리나라 땅이 세계 최고(最古)의 고대(古代) 문명국이었다고 볼 수 있는 근거 중의 한 가지를 제시한 것 뿐이다.
이제까지 우리나라 땅에서 약 8,500여 점의 구석기 시대 유물들이 발굴되었으며, 과학적인 연대측정법을 통해 약 30만~4만 5천 년 전으로 밝혀짐으로써, 세계 구석기시대 역사를 다시 쓰게 했음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의 요령성과 요하 주변의 홍산문명은 그간 알려져 온 세계 4대 문명보다 대략 2~3,000년 앞선 문명의 시발점으로 추정되고 있지 않은가?
또 수 만기의 고인돌과 돌무지 고분은 최고(最古)의 고대(古代) 문명국이었음을 입증해 주고 있지 않은가?
또 현재의 이북 평양, 한강 유역, 경주 등지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최고(最古)의 고대 문명국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앞으로 올량합[兀良哈, 또는 오량합(吾良哈), 오랑합(吾郞哈)]에 관한 기록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 보면, 이 땅에서 조선(朝鮮)을 받아들이기 이전의 모습이 좀 더 확실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