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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선화봉사 서긍이 본 "고려"가 정말로 "한반도"였나?

행복한 산비둘기 2017. 9. 11. 17:23

 

 

이제는 눈을 크게 뜰 때도 되었다.
이제는 천산산맥을 넘을 때도 된 것도 같다.

 



1123년(인종 1)에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개경(開京)에 1개월간 머무르다

선화봉사(宣和奉使)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은

우리의 눈에 매우 익었고,

우리의 귀에도 익숙해져있다.
그는 분명 "고려"에 왔다가 갔다고 했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무도 그의 글을 의심치 않고,

약간의 의심스러운 부분에서는 그가 조선,

아니 고려의 지리와 문화에 관하여

잘 알지 못하여 잘못 기록한 것으로 단정해버렸다.
그래서 아무런 의심도, 문제제기도 아니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그는 고려가 한반도이고,

그가 이 한반도에 왔다가 돌아가서

쓴 책이 바로 이《고려도경》일까?
여기에는 일단 몇 년 전에 정용선 선생님이

새로 번역하여 펴냈는데, 그는

한반도에 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서긍이 보았던 고려와, 새로 번역한

정용석 선생님의 새로운 지리적 관찰로 판단한

고려가 옳은지 한번 다시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이제 대륙조선사는 천산산맥을 넘어 아시아가

"옛날의 조선"이었으며, 유럽의 력사는 없고

아시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말이 오가고 있다.

과연 진실은 어디까지일까?
자! 그《고려도경》(권3 城)에 이런 글이 있다.

 



(1) 실로 나라와 고을에 대한

제도가 있었는지를 알 수 없다.

서역의 거슈·선선의 나라가

겨우 안담·바깥담을 쌓아

사람이 사는 성을 만들었다. … 력사가들은

이를 가리켜 성곽이라 한다.

 

 


[固未嘗知有國邑之制 西域車帥 

善 僅能築牆垣作居城. … 史家卽指爲城郭.]
[고미상지유국읍지제 서역차사선선

근능축장원작거성. … 사가즉지위성곽]

 


 


서긍이 보았던 이 견문기는

고려의 성곽에 대한 것인데,

그 성곽의 모양을 비교해 설명하면서 현재

중국의 서역이라는 곳 즉 중앙아시아,

위구르 지역에 있는 천산산맥의 근처에 있는 곳,

거수[車帥]·선선을 말하고 있다.

 

 


車帥는 고슈[姑帥]이며, 이곳은 신강성

투르판[吐魯番]·창길(昌吉)·키타이[奇台]가

있는 지역인데, 경위도로 보면,

 

 

 

북위 44도 동경 88도가 그 중심이 된다.
선선은 若羌이라고 하는 곳인데,

경위도로는 북위 42.4도 동경 90.2도이다.

 

 

 


고려의 성곽이

이런 지역과 다른 것임을

비유하고 있는데, 구태여

그렇게 해야 마땅했을까?

왜 그가 이런 곳을 비유했는지를

다음의 글로서 그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


 


(2) 고려의 강역은 그 고려의 남쪽에는

료해(遼海)에 닿으며, 서쪽에는

료수(遼水)에 닿아있으며,

 

 

 

북쪽에는 글안[契丹: 키타이]에 닿아있고,

동쪽에는 금나라[大金]에 닿아있다. 그래서

일본·류구·탐라·흑수·모인국들과

더불어 이리저리 섞여 살고 있다.

 

 


[封境: 高麗南臨遼海 西距遼水

北境契丹舊地 東距大金,

又與日本琉球耽羅黑水毛人等國 犬牙相制.]
[봉경: 고려남림료해 서거료수

북경글안구지 동거대금,

우여일본류구탐라흑수모인등국 견아상제.]

 

 


이 자료는 위의 (1)에 곧 이어서 나온 것인데,

고려의 강역을 말하고 있다. 그 글의 순서를

약간 바꾸어서 문제점을 다시 확인해보자.

 

 

 


첫째, 고려의 서쪽에 '료수'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한반도로 기준하면, 지금의

료하(遼河: 시라무렌)을 말할 수가 있다.

 

 

 

 

이것은 곧 그 동쪽이 한반도 북쪽의 만주라는 것이

고려의 터전이 되는데, 실제로 그런 적이 있었는가?

 

 

 

한반도 북쪽으로 그 강역을 가진 적이 없는 것이

반도사관의 고려 력사 속의 강역이다. 그렇다면

이 서쪽 경계의 료수는 고려의 경계가 될 수 없다.

 

 

 


둘째, 고려의 동쪽이 금[大金]나라라고 했다.

한반도 동쪽에는 배가 다니는 바다뿐이기 때문에

금나라가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금나라의

서쪽 경계, 즉 동경 115도의 서쪽에 고려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서쪽 경계가

어디가 되어야 하는지는 위의 첫째

문제제기에서 설명이 다시 이루어져야 한다.

천산을 넘게 될지 아닌지를 말이다.

 

 


셋째, 고려의 북쪽에는 글안, 키타이가

있다고 했으니, 그 키타이가 어딘지를 보자.

혹시 한자 지명 奇台(기태: 키타이)라고 하더라도,

이곳은 동경 88도 선상이 된다.

 

 

 

 

그러나 키타이는

이미 지난날에 말갈과 더불어 말한바가 있고,

흑해와 카스피해 부근이라고 한 바가 있다.

그 남족이 고려라는 말이다.

 

 

 


넷째, 고려의 남쪽에 료해(遼海)가 있다고 했는데,

이 "료해"는《중국고금지명대사전》이나,

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고려가 한반도라면

그 남쪽에 "료해"라면, "남해"바다인데,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이 또한

서긍이 잘 못 보고 쓴 글일까?

 

 

 

 

글안, 즉

키타이의 남쪽이 라고 했으니, 그 키타이가

한반도를 기준한 반도사관의 위치로 보아

"거란"이 동경 120도 선상의 하북성 지역이라면

그 남쪽이 "료해"이니 "동지나해"가 된다.

 

 

 

 

이것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는

기타이[奇台]의 남쪽이면 그 남쪽에

"인도"가 있으니 "인도양"이 그 료해가 될 것이다.

 

 

 

 

이것도 아니라면 '

중아아아시아와 서아시아에

해당되는 발하슈호·

카스피해·흑해의 남쪽,

페르시아 남쪽 아라비아해가 될 것이다.

 

 

 


이런 설명은 크게 보면

아시아 전체를 아우르게 되며,

아무리 좁혀서 보더라도

적어도 동경 50도가 되는

카스피해 동쪽 모든 지역의 대륙이 해당된다.

 

 

 


아! 넓기도 하여라.
그래서 그런 넓은 지역 안에

 "일본·류구·탐라·흑수·모인국" 등등이

서로 섞여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 일본이 어찌 일본렬도의 그 섬에 있는 것이

"서로 섞여 산다[犬牙相制]"는

말에 해당되겠는가 말이다.

그 류구가 또 어찌 "서로 섞여

산다[犬牙相制]"는 말에 해당되겠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고려의 수도 서울은 어디일까?

 

 

 


우리는 고려의 수도를 "개경(開京)·개성(開城)·

개주(開州)·송악(松嶽)·송경(松京)"이라고 한다.

다른 것은 두고라도 開京·開城·開州의 "京·城·州"의

공통은 "벌·불"이라는 "땅·나라"인데, 한자로는

"伐·不·火·野"로도 바꿔 쓰인다.

또 "開"는 소리대로 "카이·카"로 쓰인다.

 

 


그렇다면 이 "開京·開城·開州"는 다른 말로

"카불", 즉 "Kabul"이 되며, 이것은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수도이다.
다른 곳을 찾는다면, 물론 수도를

이곳 저곳에 옮겨다녔으므로 여러 곳일 수 있다.

 

 

 

 

그래서 "開京·開城·開州"는 다른 말로 "개성이라는

도읍지"의 글자로 "開都"가 된다. 이곳은

그 소리가 "카이두·하이두"가 되는데,

 "開都河·海都河"라는 강이 천산산맥의

해도산(海都山: 焉耆山)에서 동쪽으로 흘러

박사등호(博斯騰湖)로 들어가는 강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 하류에 있는

 "언기(焉耆: 카라샤르)"가

고려의 수도 "개성"이 된다.

물론 "연경(燕京)"이기도 하다.

 

 

 


이것은 곧 선화봉사 서긍이 보았던

고려의 강역과 그가

왜 고려의 성곽을 말하면서

트루판 지역의 "車帥"를 말했는지를

이제서야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서아시아의 일부까지 차지했던

고려의 강역 속에서 고대 조선, 즉

고조선의 강역이 새롭게 인식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고조선을 넓게 봐야

동경 120도 이동의, 단재 신채호나,

백암 박은식의 사관에 익숙되어 있지만,

고조선은 결코 이런 범위에 구속되어 있지도 않고,

그런 한정된 지역에 있지도 않았다.

 

 

 

 

위의 고려의 강역과 어떤 련관성이 있는지를 보자.

물론 위서라는 론란이 있기는 하지만, 일단

한번《환단고기》(제2장) <단군세기>를 보자.


(3) 제3세 단군 가륵(嘉勒) 8년(병오)에 강거가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께서 티베트에서 토버라였다. …

여름 4월에 임금께서 불함산에 올라가

마을에 밥짓는 연기가 적게 나오는 것을

보고서는 조세를 차등있게 줄이도록 명하였다.
[丙午八年 康居叛 帝討之於支伯特. …

夏四月 帝登不咸之山 望民家炊煙少起 命減租稅有差.]

 

 



개천 1715년 B.C.2175에 단군조선의 3세 가륵 때에

반란이 있어 진압했는데, 그 지역이 "강거(康居)이다.

이 "강거"에 대해서 연구한 학자 어느 누구도

어디라고 집어주지 않았다. 아마도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이곳은 중앙아시아의

사마르칸트이며, 시르 다르여(Syr Dar'ya) 중류에 있다.

 

 

 

이곳이 어찌 무슨 사관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오직 "아시아 조선 사관"만이 가능하다.
물론 이곳은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보다는

북쪽에 있으며, 신강성 북부의 "트루판"이 있는

지역보다는 훨씬 서쪽이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의

중요 도시임에는 분명하다.

 

 


바로 이 지역에서 동남쪽으로 멀지 않는

티베트 지역으로 가서 가륵 황제가

민심을 돌보았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의

 "불함산"은 의심할 것도 없이"파미르고원"의

"천산(天山)"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려의 강역은 물론 고대조선의

강역보다 좁아진 것은 분명하지만 그

고대조선의 강역 속에 고려가 있었던 것인데,

그 고려의 수도가 있었던 곳은 한반도도 아니고,

중국대륙의 "하남성 개봉(開封)"도 아님을 알 수 있다.

 

 

 

고려는 넓고도 넓은 천산산맥을 넘어선 곳까지

차지한 나라였다. 그래서《고려사》(지리지)의

맨 첫줄에 "고려의 강역이 동서로 1만여리"라고

했던 것이 이제야 실감이 난다.

 

 

 

 

대륙조선사연구회 최두환박사님의 글 중에서


출처 : 심 청 사 달 [ 心 淸 事 達 ]
글쓴이 : 청심사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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