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고려(高麗) 개국
1. 신라의 쇠퇴, 궁예와 견훤의 반란
『삼국사기』신라본기 진성왕(眞聖王, 887~897년) 3년(889년)의 기록에 따르면, 지방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 나라의 창고가 텅텅 비었으며, 곳곳에서 도적 떼가 일어나고 반란이 있어났다고 한다.
즉, 양길과 궁예가 북원(北原)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견훤이 완산주(完山州)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성왕(眞聖王) 5년(891년) 겨울 10월에 북원(北原)의 도적 장수 양길(梁吉)이 자기 막료 궁예(弓裔)를 보내 기병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북원(北原)의 동쪽 부락과 명주(溟州) 관내의 주천(酒泉) 등 10여 군현을 습격하였다."
"진성왕(眞聖王) 6년(892년) 완산(完山)의 도적 견훤(甄萱)이 완산주를 근거로 스스로 후백제라 일컬으니, 무주(武州) 동남쪽의 군현들이 항복해 붙었다.
그런데 양길과 궁예가 반란을 일으킨 북원(北原)은 과연 어디인가?
또 견훤이 반란을 일으킨 완산주(完山州)는 어디인가?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학계 다수설에 근거하여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북원은 현 강원도 원주(原州)였으며, 완산주는 현 전라북도 전주(全州)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림 1] 북원, 완산주(전주), 금성 등(모두 위사임)
과연 올바른 것인가?
국사 교과서에 써있고 학계 다수설이라고 하니 그런가부다하고 그렇게 알고 살아도 결코 수많은 백성(百姓)의 삶에 별 무리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줄 알고 살고 있으니, 틀렸다고 핀찬하는 소리를 들을 이유도 없고, 우매하다는 소리도 듣지 않으며, 바쁜 경제활동 와중에 별다른 손해를 보는 일도 없고, 오히려 교양이 있다는 소리를 들으면서 평안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學問)은 이로운 것을 찾기 위한 활동이 아니라 진실하고 올바른 것을 찾기 위한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우리 민족의 대략 10~20%에 속하는 리더들은 틀린 것이 있으면, 항상 바로 잡으려 하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스스로 나서서 배우고 공부하려고 할 것이다.
즉, 이들은 결코 평안한 생활에 안주하지 않고 늘 우리 민족의 현실과 미래를 근심하며 고민하고 있으며, 항상 우리의 정체성을 올바르게 바로 잡으려고 애를 쓰고 있으며, 늘 우리 민족의 미래 비전을 찾아야 할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고 활동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거의 모든 분야가 유사하겠지만, 역사 분야에 있어서도 왜곡된 부분을 바로잡고, 몰랐던 부분을 밝혀냄으로써, 우리 민족의 미래 비전을 올바르게 세울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편,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新羅)가 서기전 57년에 건국되었으며, 서기전 39년에 금성(金城)을 쌓고 도읍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과연 신라의 도읍지 금성(金城)은 어디에 있었는가?
또 신라(新羅)가 101년에 금성(金城)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으며 왕이 월성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과연 월성(月城)은 어디에 있었는가?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의 왕성(王城)이 월성 외에도 신월성(新月城)이 있었으며, 신월성 주위에 만월성·명활성·남산성 등이 었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월성(新月城) 북쪽에 만월성(滿月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8백 38보였다."
"신월성(新月城) 동쪽에 명활성(明活城)이 있는데 둘레가 1천 9백 6보였다."
"신월성(新月城) 남쪽에 남산성(南山城)이 있는데 둘레가 2천 8백 4보였다."
"시조(始祖) 이래로 금성(金城)에 거처하다가, 후세에 이르러서는 두 월성(月城)에 많이 거처하였다."
비록 『삼국사기』에 신월성(新月城)을 쌓았다는 기록은 없으나, 위와 같이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의 왕성(王城)으로서 월성(月城) 외에 신월성(新月城)이 있었는데, 왕(王)이 후세(後世)에 이르러서 두 월성(月城)에 많이 거처하였다고 하니 월성(月城) 외에 신월성(新月城)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과연 신월성(新月城)은 어디에 있었는가?
그런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흥왕(眞興王)이 553년에 월성(月城) 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나타나서 계획을 바꿔 황룡사(皇龍寺)를 지었다고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眞興王) 14년(553년) 봄 2월에 왕이 담당 관청에 명하여 월성(月城)의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는데, 황룡(黃龍)이 그곳에서 나타났다. 왕이 이상하게 여겨서 (계획을) 바꾸어 절로 만들고 이름을 황룡사(皇龍寺)이라고 하였다."
또 『삼국유사』 '탑상제사(塔像第四)'편 '황룡사장육(皇龍寺丈六)'에 따르면, 황룡사(皇龍寺)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신라 제24대 진흥왕(眞興王) 즉위 14년 계유(553년) 2월, 장차 궁궐을 용궁(龍宮) 의 남쪽에 지으려 하는데, 황룡(黃龍)이 그 땅에 나타나서 이에 고쳐서 절을 짓고 황룡사(黃龍寺) 라고 하였다. 기축년(569년)에 이르러 담을 두르고 17년 만에 바야흐로 완성하였다."
즉, 궁궐을 지려다가 절을 지었다고 하는데, 황룡사(皇龍寺)의 위치가 『삼국사기』에는 월성(月城) 의 동쪽 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는 용궁(龍宮) 의 남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월성이 바로 용궁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월성의 동쪽을 샅샅이 뒤지면, 황룡사가 나와야 할 것이다. 또는 용궁이 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월성의 남쪽을 샅샅이 뒤지면, 황룡사가 나와야만 할 것이다.
즉, 『삼국사기』이든지『삼국유사』이든지 간에 고대 지명(地名)의 위치에 관하여 서로 상충되는 기록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동서남북 방향을 고쳐놨다든지, 같은 곳을 서로 다른 지명으로 기록한 부분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국사 교과서에 따르면, 신라 초기의 도읍지 금성(金城)과 월성(月城), 신월성(新月城) 등이 모두 현재의 경북 경주였던 것처럼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표기되어 있다.
그런데 신라의 도읍지 금성(金城)과 월성(月城), 신월성(新月城) 등이 현재의 경북 경주에 있었다는 기록은 아무 곳에도 없다.
다만, 『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신라(新羅)의 위치와 관련하여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신라(新羅) 강역(疆域)의 경계는 옛 기록들 내용이 서로 같지 않다. 두우(杜佑)의 『통전(通典)』에는 '그 선조는 본래 진한(辰韓)의 종족이다. 그 나라는 백제(百濟), 고려(高麗, 고구려) 두 나라의 동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접해있다.'라 적혀 있다.'고 적혀 있다."
"유구(劉煦)의 『당서(唐書, 구당서)』에는 '동남쪽 모두 큰 바다로 경계가 된다.'고 적혀 있다."
"등주(登州)로부터 동북방향으로 해(海)를 따라가면, 대사도(大謝島)․귀흠도(龜歆島)․말도(末島)․오호도(烏湖島)까지 300리다.
북쪽으로 오호해(烏湖海)를 넘어가면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鎭)까지 200리이며, 동쪽으로 해안을 따라가면 청리포(靑泥浦)․도화포(桃花浦)․향화포(杏花浦)․석인왕(石人汪)․탁타만(橐駝灣)․오골강(烏骨江)까지 800리다.
남쪽으로 해안을 따라가면, 패강구(貝江口)․초도(椒島)를 지나 신라 서북쪽의 장구진(長口鎭)에 도달한다. 또 진왕석교(秦王石橋)․마전도(麻田島)․고사도(古寺島)․득물도(得物島)를 지나면 1,000리 거리에 압록강(鴨淥江) 당은포구(唐恩浦口)가 있다. 또 동남쪽으로 육로를 700리를 가면 신라왕성(新羅王城)에 도달한다.
압록강구(鴨淥江口)에서 100여 리 가서 작은 배로 동북방향으로 30리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汋口)에 도달하는데 발해(渤海) 국경이다. 500리(里)를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성(丸都縣城)에 도달하는데 옛 고구려왕도(高麗王都)이며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권28 '관구검전(毌丘儉傳)'과 권30 '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을 살펴보면 모두 고구려수도(高句麗都)가 환도(丸都)라고 쓰여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도 환도(丸都)라고 썼다.
또 동북방향으로 200리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도달하고 또육행으로 400리 가면 현주(顯州)에 도달하는데 천보(天寶, 742~755년) 중에 왕(王)의 수도였다. 또 정북여동(正北如東)으로 600리를 가면 발해왕성(渤海王城)에 도달한다."
즉, 상기한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 근거하여 현재 국사 교과서에 적용된 상태는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등주(登州)는 현재의 산동반도이며, 마석산(馬石山) 동쪽의 도리진(都里鎭)은 현재의 요령성 요동반도이고, 패강구(貝江口)와 초도(椒島)는 현재의 이북 대동강 입구이며, 득물도(得物島)도 현재의 우리나라 인천 앞바다이고, 신라왕성(新羅王城)은 경북 경주인 셈이다.
[그림 2]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 등주(기록을 엉뚱한 곳에 적용하였음)
그런데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하북도(河北道) 등주(登州)'의 기록을 현재의 산동반도에서부터 압록강과 대동강을 거쳐 경북 경주에 이르는 지역에 적용한 것은 문제가 있다.
즉, 누가보더라도 의문을 갖을 수 있는 점은 '하북도(河北道)'에 관한 지리적 내용을 왜 산동반도에서부터 현재의 우리나라 땅에 적용했느냐 하는 점이다.
'하북도(河北道)'는 현재의 북경시를 비롯하여 황하 이북 지역을 말하는데, 현재의 우리나라 땅이 당(唐) 시대에 하북도(河北道)에 속했다는 말인가?
또는 현재의 산동반도가 당(唐) 시대에 하북도(河北道)에 소속되어 있었는가?
도대체 '하북도(河北道) 등주(登州)'가 왜 산동반도에 와 붙었는가?
'등주(登州)'란 곳의 위치가 현재의 산동반도에 있었다는 말인가?
즉,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에 기록되어 있는 '하북도(河北道) 등주(登州)'의 지리적인 내용을 엉뚱한 곳에 적용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상기한 기록에 나타나는 800리, 1,000리, 700리, 500리 등의 거리들이 우리나라 땅에 맞지 않는다. 길거나 짧거나 들쑥날쑥이다.
그렇다면, '하북도(河北道) 등주(登州)'의 기록을 어느 곳에 적용하여야 하는가?
당연히 '하북도'에 관한 지리를 '하북도'에 적용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선 '등주(登州)'라는 지명이 변이(變移)된 지명이어서 그 위치를 알 수 없으므로 '등주(登州)'를 현재의 산동반도에 위치시킬 수가 없다. 그대신 압록수 입구를 의미하는 압록강구(鴨淥江口)를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앞바다, 즉, 현재의 호타하 입구에 놓고 윗글에 적혀있는대로 방향과 거리에 따라 지명들의 위치를 찾아가면, [그림 3]과 같이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림 3] 『신당서』 지리지 하북도 등주(기록의 올바른 추정)
압록강구(鴨淥江口)를 현재의 하북성 천진시 앞바다, 즉, 현재의 호타하 입구에 놓은 이유는 본래 윗글이 '하북도(河北道)'에 관한 지리이기 때문이다.
처음에 본 연구원이 '압록수가 현재의 호타하일 경우'로 가정하고 적용해 본 것인데, 일부 미심적은 부분이 남아있지마는 윗글에 나타나는 각 지명들이 '하북도'에서 매우 근사하게 배치될 수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더우기 『신당서』, 『요사』 등 다른 사서의 기록에 의해서도 고구려의 주요 지명들이 현재의 하북성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림 3]의 적용은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요 지명들이 위치한 지역에 아직도 수많은 유적들이 적나라하게 남아있으니 더할 나위없이 고대 지명들의 위치가 올바르게 추정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신라왕성 월성(月城)의 위치를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임기시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新羅) 초기의 도읍지 금성(金城)은 월성(月城)과 같은 곳에 있지 않았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新羅)가 101년에 금성(金城) 동남쪽에 성을 쌓아 월성(月城), 혹은 재성(在城)이라고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임기시에서 서북쪽 방향에 금성(金城)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임기시의 서북쪽 방향에 [그림 3]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가 위치하고 있는데, 그 주변지역에 금성(金城)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산동성 제남시를 금성(金城)이 있었던 곳으로 꼽을 수 있는 이유는 예부터 사람들은 살기 좋은 곳에 모여 살기 시작했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특별한 변고가 있지 않는 이상 점점 도시가 크게 발전해 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금성(金城)의 유적이 아직 남아있다면, 찾아서 확인하는 일이 남아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처음에는 신라의 금성(金城)이었지만, 백제가 서기전 6년에 현재의 황하를 건너 도읍지를 하남 위례성으로 옮겼는데, 바로 신라의 금성(金城)이 있었던 현재의 산동성 제남시로 추정할 수 있다. 즉, 백제의 도읍지 하남 위례성의 위치를 현재의 제남시로 추정할 수 있는데, 백제가 신라의 금성(金城) 주변 지역을 차지하고 하남 위례성을 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신라(新羅)가 금성(金城)에서 동남쪽에 월성(月城)을 쌓고 왕이 거처를 옮긴 해는 101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백제가 신라의 금성(金城) 주변지역으로 도읍지를 옮겨 온 해는 서기전 6년이다.
혹자는 년도가 서로 틀리니 신라의 금성(金城)과 백제의 하남 위례성의 위치가 같은 지역에 있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반대로 지명의 본래 위치를 찾고나니, 백제가 신라 금성(金城)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빠져있음을 알게 되었고, 삼국시대 초기기록들의 연대가 뒤바뀌었음을 알아채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고대 역사적인 지명들의 본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된 계기는 『삼국사기』 지리지를 비롯하여 중화인민국 25사(史) 지리지를 몽땅 외우고 종합하므로써, 위사(僞史)들을 모두 걸러내고 남아있는 기존의 진사(眞史)들에 근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각 지명의 위치를 주변 국가와 비교하여 지리적으로 확인하였으며, 시대별로 고대 국가들의 강역(疆域)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고대 지명들의 본래 위치가 밝혀짐으로써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인데도 불구하고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은 도읍지 천도, 전쟁 등을 유추해 낼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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